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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현선생

충암 김정선생 규암 송인수선생 청음 김상헌선생 동계 정온선생 우암 송시열선생

(1486 - 1521) 1520년

 (중종 15년) 

기묘사화로 유배

(1487 - 1547) 1534년

 (중종 29년) 

제주목사로 좌천

(1570 - 1652) 1601년

  (선조 34년)

 안무어사

(1569 - 1641) 1614년

(광해군 6년) 

폐모론의 부당함을 주장하다 유배

(1607 - 1689) 1689년

(숙종 15년) 

세자책봉 사건 으로 유배

 

1. 충암 김정 (冲菴 金淨,1486~1520)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경주, 자는 원충, 호는 충암,고붕. 보은 출신. 1507년 증광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으로 보임되고, 홍문 관수찬, 병조화랑을 거쳐 정언에 전입되었다.

이어서 병조정랑, 홍문관부교리, 헌납,홍문관교리, 이조정랑 등을 거쳐 1514년에 순창 군수가 되었다. 이 때 왕의 구언에 응하여 담양부사 박상과 함께 일찍이 중종이 왕후 신씨를 폐출한 처사가 명분에 어긋나는 일이라 하여신씨의 복위를 주장함과 아울러 신씨폐위의 주모자인 박원종 등을 주최 할 것을 상소하였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보은에 유배되었다. 얼마뒤 그는 박상과 함께 재등용되고 응교, 전한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뒤에 예,부제학,동부승지,좌승지, 이조참판,도승지,대사헌 등을 거쳐 형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러한 그의 정치적 성장은 괄목할 정도였는데, 그것은 당시 사림파의 급속한 성장과 긴밀한 관계를 지닌 것이었다.

그뒤 기묘사화로 인해 극형에 처해지게 되었으나, 영의정 정광필등의 옹호로 금산에 유배되었다가, 진도를 거쳐 다시 제주도로 옮겨졌다. 그뒤 신사무옥에 연루되어 사람파의 주축인 생존자 3명과 함께 다시 중죄에 처해져 사사되었다. 1545년에 복관되었고, 1646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관료생활을 하면서도 성리학에 대한 학문정진을 게울리 하지 않았고, 또한 시문과 그림에도 능하였다. 조광조의 정치적 성장을 뒤에서 도와 조광조와 함께 사림파의 대표적인 존재이다.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개혁정치를 폈는데, 그 일환으로 미신타파와 향약의 실시, 정국공신의 위훈삭제 등을 추진하였다. 저서로는 '충암집'이 있으며, 시호는 처음에는 문정이고 나중에 문간으로 고쳐졌다.

 

2. 규암 송인수 (圭菴 宋麟壽,1487~154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은진. 자는 미수 또는 태수, 호는 규암. 아버지는 건원릉참봉 세량이다. 진사 엄용공에게 배웠고, 김안국에게 지도를 받았다. 1521년 별시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정자가 되었다.

이때 김안로가 권력을 쥐고 정권을 오로지하자 홍문관의 모든 관원이 함꼐 인사행정의 공정한 실시를 내세워 김안로를 탄핵하였다. 이어서 경연의 전경을 겸임하고 왕의 특지로 충청도 지방을 순찰한 뒤 공물,잡역의 해를 보고하였다. 1525년 박사로 승진하고 이어서 부수찬 수찬을 거쳐 사간원 정언이 되어 검토관으로써 경연에 참여하였는데, 육조낭관 임면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 뒤 사헌부 지평, 홍문관의 교리, 부응교등을 역임하면서 당시 유행한 사치풍조를 배격하고 교육 진흥책을 건의하였으며, 특히 김안로의 재집권을 막으려 하다가 오히려 그 일파에게 미움을 받아 1534년 제주목사로 좌천되었다.

이때 그는 병을 청탁하고 부임하지 않았는데, 이를 빌미로 김안로일파에게 탄핵을 받아 사천으로 유배되었다. 1537년 김안로 일당이 몰락하자 풀려나 이듬해 예조참의가 되고 성균관 대사성을 겸임하면서 후학에게 성리학을 강론하였다. 이어서 승정원 동부승지와 예조참판을 거쳐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는데, 윤원형, 이기 등의 미움을 받아 1543년 전라도 관찰사로 좌천되었다. 관찰사에 부임하여 형옥사건을 제때에 처리하고 교화에 힘써 풍속을 바로 잡았으며, 교육을 진흥시켜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특히 조정의 숭유정책을 받들어 영암에 기영정을 세우고 학술을 장려하였다. 이때 남평현감 유희춘, 무장현감 백인걸등과 뜻이 맞아 학문을 토론하였다.

인종 즉위후, 동지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와 다시 대사헌이 되어 윤원형을 탄핵하였는데, 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한성부좌윤에 있다가 탄핵을 받고 파직당하여 청주에 은거하여 있다가 사사되었다. 성리학에 밝았고 성리학을 보급하기에 힘썼다. 평생 학문을 좋아하여 사림의 추앙을 받았으며 제주의 귤림서원에 제향되었다. 선조 때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저서에 '규암집'이 있다. 시호는 문충이다.

 

3. 청음 김상헌 (淸陰 金尙憲,1570~1652)

조선시대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숙도, 호는 청음, 석실산인. 1596년(선조 29)에 정시 문과에 급제하고, 1608년에는 다시 문과에 중시에 급제하여 교리,직제학 등의 벼슬을 지냈다.

1615년(광해군 7)에 지은 글이 광해군의 뜻에 거슬여 파직되었는데, <인조반정> 후 재등용 되어 도승지, 대상헌, 대제학,이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예조판성로서 청나라와의 화의를 적극 반대하여 최명길들이 기초하던 국서(항복문서)를 찢고 통곡했다. 그 죄로 이듬해 벼슬을 잃고 ,1639년 청나라에서 명나라를 치기위한 군사파견을 요구해 왔을 때,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일로 이듬해에 심양으로 잡혀갔다.

1642년에 의주로 돌아왔으나 명나라와 밀무역을 하다 청나라에 잡혀간 이 계가 조선이 명나라를 숭배하고 청을 배척한다고 고해바쳐 최명길등과 함께 다시 심양에 잡혀갔다. 1645년 풀려나와 귀국한 후 좌의정등을 지냈다. 곧은 절개로 존경을 받았으며, 명필로도 이름이 높았다. 저서에 <청음집>등을 남겼다. 시호는 문정이다.

 

4. 동계 정온 (桐溪 鄭蘊,1569~164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초계. 자는 휘원, 호는 동계. 진사 유명의 아들이다.

1601년에 진사가 되고 1610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시강원겸설서, 사간원정언을 역임하였다.

임해군 옥사에 대해서 전은설을 주장하였고, 영창대군이 강화부사 정항에 의해서 피살되자 격렬한 상소를 올려 정항의 처벌과 당시 일어나고 있던 폐모론의 부당함을 주장하였다. 이에 광해군은 격분하여 이원익, 심희수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문할 것을 명하고 이어서 제주도에 위리안치하도록 하였다.

그 뒤 인조반정 때까지 10년 동안 유배지인 제주에서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중국 옛 성현들의 명언을 모은 '덕변록'을 지어 이것으로 자신을 뒤돌아보았다. 인조반정 후 광해군때 절의를 지킨 인물로 지목되어 사간, 이조참의, 대사간, 대제학, 이조참판 등 청요직을 역임하였다. 특히, 언관에 있으면서 반정공신들의 비리와 병권장악을 공격하였고, 폐세자와 선조의 서자 인성군 공의 옥사에 대해서 전은설을 주장하여 공신들을 견제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행재소로 왕을 호종하였고,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이조참판으로서 명나라와 조선과의 의리를 내세워 최명길등의 화의 주장을 적극 반대하였다. 강화도가 함락되고 항복이 결정되자 오랑캐에게 항복하는 수치를 참을 수 없다고 하며 칼로 자결하려하였으나 목숨은 끊어지지 않았다. 그 뒤 관직을 단념하고 덕유산에 들어가 조를 심어 생계를 자급하다가 죽었다.

숙종때 절의를 높이 평가하여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허목, 조경등 기호남인과도 깊은 관계를 가져 이황-정구-허목으로 이어지는 기호남인 학통 수립에도 큰 구실을 하였다. 광주의 현절사, 제주의 귤림서원, 함양의 남계서원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간이다.

 

5. 우암 송시열 (尤庵 宋時烈,1607~1689)

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 본관은 은진. 아명은 성뢰. 자는 영보. 호는 우암 또는 우재. 아버지는 사옹원봉사 갑조이며, 어머니는 선산곽씨로 봉사 자방의 딸이다. 충청도 옥천군 구룡촌 외가에서 태어나 26세때까지 그곳에서 살았으나 후에는 회덕의 송촌, 비래동, 소제 등지로 옮겨가며 살았다. 27세 때 생원시에서 '일음일양지위도'를 논술하여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이때부터 그의 학문적 명성이 널리 알려졌고 2년 뒤인 1635년에는 봉림대군의 사부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병자호란으로 왕이 치욕을 당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혀가자, 낙향하여 10여년간 일체의 벼슬을 사양하고 전야에 묻혀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여 척화파 및 재야학자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그에게도 사헌부 장령등의 관직을주어 부르자 그는 비로소 벼슬에 나아갔다. 이 때 그가 올린 '기축 봉사' 중에서 존주 대의와 복수 설치를 역설한 것이 효종의 북벌의지와 부합하여 장차 북벌계획의 핵심인물로 발탁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다음해 2월 김자점 일파가 청나라에 조선의 북벌동향을 밀고함으로써, 송시열을 포함한 산당 일파는 모두 조정에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 재야에 머물며 은둔생활을 하였으나 1658년 7월 효종의 간곡한 부탁으로 다시 찬선에 임명되어 관직에 나아갔고, 9월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다음해 5월까지 왕의 절대적 신임속에 북벌계획의 중심인물로 활약하였다.

1659년 5월, 효종이 급서한 뒤에 국왕 현종에 대한 실망 때문에 그해 12월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이후 현종 15년간 조정에서 융숭한 예우와 부단한 초빙이 있었으나 그는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1674년 효종비의 상으로 인한 제2차 예송에서 그의론을 추종한 서인들이 패배하자 그도 예를 그르친 죄로 파직,삭출되었고, 1675년 정월 덕원으로 유배되고 후에 장기, 거제로 유배되었다가 잠시 복귀하였으나 기사환국이 일어나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그 해 6월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러나 1694년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정권을 잡자 그의 억울한 죽음이 무죄로 인정되어 관작이 회복되고 제사가 내려졌다. 송시열의 학문은 주자의 학설을 계승한 것으로 자부하였으나, 조광조-이이-김장생으로 이어진 기호학파의 학통을 충실히 계승,발전시킨 것이기도 하였다. 그는 언필칭 주자의 교의를 신봉하고 실천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주자 대전차의>, <주자어류소분> 등의 저술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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